생체 시스템의 호모키랄성과 인공 화합물의 라세미체
앞선 글에서 자연계에 입체 이성질체들이 널리 분포해 있으나, 생물적 시스템은 거울상 이성질체 중 특정한 한 형태만을 독점적으로 선호하는 경향 즉, 아미노산은 L-형으로, 당은 D-형으로 존재하는 호모키랄성을 나타내며, 이는 생체내 효소, 수용체등과 같은 분자들과의 작용과 관련이 있는데, 예를 들어 효소는 특정한 입체구조를 가진 기질에만 선택적으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이성질체만이 이들과 상호작용하여 기능함을 살펴보았다. 생체내에서 기능해야 할 약물을 인공적으로 합성할 때, 키랄 중심을 갖는 약품의 경우 두 가지 거울상 이성질체가 모두 합성되므로 이러한 효소들의 선택성에 문제가 생긴다. 입체구조에 따라 생체내에서 생체분자와 반응하여 활성을 가질 수도 있고, 활성이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부작용과 같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왼손잡이든 오른손잡이든, 우리는 통상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다. 왼손잡이들도 대부분 오른손잡이들이 쓰는 가위를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간다. 호의를 보이기 위해 악수를 청할 때 약속되지 않은 손을 내민다면 전달하려던 메시지는 사라지고 원치 않았던 엉뚱한 신호를 보내게 될 수도 있듯이, 두 거울상 세트들은 서로 의도되지 않은 신호를 보낼수도 있다.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하지만 생체분자들은 내부적으로 이미 호모키랄성이 확립되어 이러한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문제는 생명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분자합성이 아니라 생명체 밖, 즉 인공적으로 분자를 합성하는 경우이다. 생명체에는 특정 형태에 대한 높은 선택성과 효율성을 도와주는 효소들이 존재하지만, 인공적인 분자 합성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해줄 효소가 없으므로 실험실에서는 항상 라세미 혼합물의 형태로 만들어져 두 가지 거울상 이성질체가 모두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호모키랄성이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생명성을 반증한다고 하기도 한다. 자연상태에서 라세미 혼합물은 드물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공합성과 라세미혼합물이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작정하고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분자를 합성하면서 두 거울상 이성질체를 신경 써야 할 상황은 드물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약국에서 약을 사 복용한다.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약을 복용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약물 중에는 키랄성을 가지는 분자들이 상당히 많으며, 이 키랄 약물은 거의 늘 라세미체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라세미체를 구성하는 두 쌍둥이는 생물학적 시스템을 만났을 때 흡수, 분포, 생물학적 변형, 배설과 같은 약동학적 측면과 약리학적 효과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 비극
그렇다면 약품과 같은 인공 분자 합성시 항상 라세미 혼합물로 두 가지 이성질체 형태가 모두 나타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는 제약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했던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라는 의약품 사건을 조명해 보면 그 무게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수많은 희생자를 초래하며 우리 인류에게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1960년대 초반, 독일 회사가 개발한 탈리도마이드라는 약물은 신경안정제로 조제되어 이후 임산부들의 입덧을 진정시키는 안정제로 처방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주로 쥐를 대상으로 동물실험까지 마쳐 안전하다고 판단되어 출시되었으나, 이 약물을 복용한 임산부에서 팔과 다리가 성장하지 않은 심각한 선천적 기형을 가진 신생아들이 태어났다. 대략 만 명이나 되는 신생아들이 팔이나 다리가 거의 없이 태어났다.
비극의 배경은 이러하다. 이 약물의 두 가지 거울상 이성질체 중, R-형은 진정효과를 나타내지만 S-형은 혈관 신생(Angiogenesis)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는데, 임산부가 복용할 경우 태아의 세포가 성장하고 분화하기 위하여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할 혈관이 자라지 못하게 되어 결국 팔 다리의 정상적인 성장을 막은 것이다. 약물 제조 시 이 두 가지 이성질체가 동시에 합성되어 혼합된 상태로 존재하며, 이 둘이 서로 다른 생리적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이 그 당시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두 이성질체의 분리가 기술적으로 가능하였다 하더라도 아마도 그 비용이 매우 컸을 것이며, 또한 더욱더 놀라운 것은 설령 두 이성질체를 완전히 분리하여 R-형만 따로 분리하여 제조한다 할지라도 생체내에서 서로 상대방 이성질체로 상호전환(bioinversion)되어 결국 두 형태가 모두 합성되는 결과가 될 수 있음이 이후 밝혀졌다. 이 사건은 의약품 제조와 관련하여 많은 교훈을 남겼다. 동물과 인간의 대사 경로가 다르므로 생리적인 반응이 다를 수 있다는 동물 실험의 한계가 한 축으로 크게 대두되었고, 두 거울상 이성질체의 개별적인 생리학적 작용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 안전성 확보가 얼마나 중대한지를 인식하게 되어, 이후 약물 개발 시 새로운 화학물질의 안정성, 독성, 약동학, 체내 대사 등을 포함하는 임상 시험의 체계화, 신약 승인 과정, 모니터링 등에서 대대적인 변화와 규제의 강화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키랄 약물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신중한 접근방법에 끼친 영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키랄 약품(Chiral drugs)
제약회사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생산되는 의약품 중 다수가 키랄 약물이고, 이들이 1:1 비율의 R-형과 S-형의 라세미 혼합물로 합성되는 것은 피할수 없는 사실이다. 쌍둥이처럼 닮은 이 두 형태는 전혀 다른 생리학적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물론, 키랄 약물 중에는 라세미 혼합물 상태로도 충분히 안전한 것으로 알려진 것도 있고, 비활성 이성질체가 체내에서 자연스럽게 효소들의 작용으로 활성 이성질체로 전환되는 것도 있다. 또한 비활성 이성질체가 해롭지 않아 별도의 고려 없이 라세미혼합물로 처방되는 경우(이부프로펜)도 있고, 라세미 혼합물로터 비용이 더 높게 들더라도 단일 이성질체 약품을 만들어 기존 라세미혼합물 형태의 약물 둘을 모두 판매하여 환자가 자신의 경제상태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한 경우도 있다(에스오메프라졸(S-형)과 오메프라졸). 이성질체 간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경우 별도로 고려 자체를 안 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약물이 생체 내에서 표적(효소, 수용체)에 결합하여 곧바로 약리 작용을 하여 즉시 치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상태를 활성형(active form)이라 하고, 약리 작용이 없는 상태로서 간 등에서 대사를 통해 활성형으로 변환되는 약물 형태를 비활성형(inactive form)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신지로이드(Synthroid)와 같은 갑상선 저하증 환자를 위한 T4제제는 비활성약물로 체내에서 간과 신장에서 대사를 통해 효소에 의해 T3로 전환되어야 생리학적 효과를 발휘한다.
약물 개발의 약동학과 약력학
신약 개발 과정은 약동학과 약리학을 포함한다. 약동학(Pharmacokinetics)은 약물이 체내에서 어떻게 흡수, 분포, 대사, 배설되는 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키랄 약물의 경우 두 이성질체가 동일한 약물임에도 체내 용해력이나 장벽 투과면에서 차이가 나서 다른 흡수율을 보일 수 있고, 이성질체마다 체내 조직내 분포하는 비율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효소의 선택적 작용에 따라 대사율이나 대사속도가 달라져 체내에서 활성상태가 지속되는 시간이 다를 수도 있다. 또한 신장 등의 배설 경로에서도 차이가 날 수 있다. 어떤 이성질체는 신장에서 재흡수될 수도 있다. 약력학(Pharmacodynamics)은 약물이 체내에서 수용체나 효소와 같은 표적에 어떻게 작용하여 생리적 효과를 내는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주의할 것은 키랄 약물들은 약리적 활성, 효능, 그리고 부작용에서 모두 차이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수용체나 효소들은 단백질분자들이고, 앞 선 글에서 보았듯이 체내 단백질은 거의 대부분 L-형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자신들 역시 키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과 딱 맞는 구조를 가진 키랄 약물에 더 큰 친화성을 보인다. 따라서 이성질체는 특정 수용체와 결합했을 때에만 활성을 보이기도 하고, 한 이성질체가 완전한 작용제(agonist)로 효능을 보이거나 또는 길항제(antagonist)로 효과를 막는 작용을 하는 반면 그 쌍둥이 이성질체는 부분적으로만 작용하거나 길항할 수 도 있다. 다양한 결과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이성질체 중 하나는 치료효과를 내지만 나머지 하나는 오히려 독성이나 부작용을 유발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키랄 약물을 개발할 때에도, 이러한 다양한 면들을 평가하여 약물제조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키랄 약리학(chiral pharmacology)
라세미 약물에 대한 관심 증가와 키랄성에 관련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입체 약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출현했다. 이 분야는 키랄 쌍둥이 두 형태를 각각의 별도의 종으로 간주하여 각각의 약리학적 활동을 연구하는데, 두 쌍둥이 유형 중에서 생리적, 약리학적 활성이 더 강한 쪽을 유토머(eutomer), 활성이 상대적으로 덜한 쪽을 디스토머(distomer)라는 기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구별한다. 키랄 의약품의 두 거울상 이성질체가 유토머와 디스토머로 명확히 구분이 가능할 경우, 약물 개발 과정에서 활성형 이성질체 유토머 만을 활용하여 효능을 극대화할 것이고, 만일 디스토머에 독성이나 부작용 위험이 있다면 이후 ‘키랄 스위칭’ 방법을 통해 유토머로 전환시켜 안정성과 효능을 확보하는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 물론 디스토머가 심각한 독성을 유발할 수 있다면 약물 합성 후 해당 디스토머를 아예 분리하여 제거하여 최종제품에 포함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나, 이 경우 고도로 정밀한 키랄 분리기술이 요구되어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도 있다.
키랄 약물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얼굴의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 앞선 글에서 거울질 이성질체를 명명하는 여러 방법을 살펴보았는데 이 글에서는 가장 보편적이고 국제 표준으로 사용되고 있는 R/S 명명법으로 두 거울질 이성질체를 구별하기로 한다. 하나의 키랄 중심을 갖는 페니실라민(Penicillamine)의 S-형은 중금속 해독제 및 류마티스 관절염 치료제로서 과다한 체내 구리 축적을 유발하는 윌슨병 치료에 사용되지만, R-형은 독성도 강하고 부작용 유발 가능성이 커서 보통 활성형(유토머)만 사용하여 안전한 약물을 설계한다. 널리 사용되는 마취제인 케타민(Ketamine)의 S-형으로 만들어진 S-케타민은 진정/항우울 효과가 뛰어나지만 R-케타민은 환각과 정신분열증상 유발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몇몇 연예인들의 마약 관련 기사에서 종종 언급되었던 케타민은 분명 R-케타민인 것 같다. ‘케타민 복용 혐의’라는 타이틀로 미루어 보아 위험한 향정신성의약품으로서 분명한 디스토머라 하겠다. 라세미 혼합형이 아닌 S-케타민 만으로 구성된 형태인 에스케타민(Esketamine)은 시판되어 전신마취제 및 우울증 치료제로 쓰이고 있다.
파킨슨병과 L-도파
파킨슨 병 치료제로 매우 잘 알려져있는 L-도파(dopa, levodopa, S-형)는 부족한 도파민을 보충해 주기 위한 도파민 전구체 약물이다. 도파민성 뉴런의 파괴로 운동과 감정 조절에 관여하는 도파민 신호가 감소되어 발병하는 파킨슨 병의 치료에 L-도파가 최초로 승인되었고 이후로도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어오고 있다. 도파민이 뇌혈관장벽(Blood-Brain Barrier, BBB)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환자에게 직접 투여하는 대신 그 전구체인 L-도파를 투여하여 뇌에서 도파민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기전이다. 체내에서 신경 전달 물질(또는 호르몬)인 카테콜라민(Catecholamine)의 순차적인 합성 경로를 보자면, L-티로신(Tyrosine) → L-도파 → 도파민(Dopamine) →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 → 에피네프린(Epinephrine)의 순서이다. 물론 생체분자의 호모키랄성으로 인체 내에서는 L- 도파만이 생성된다. 하지만 약품으로 인공적으로 합성하게 되면 L형과 D형(S/R-형) 모두 합성되는데, D형은 체내 효소가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에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백혈구 중 과립구 감소증(granulocytopenia) 같은 면역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L-도파 단일 이성질체만이 약물로 승인되어 사용되고 있다.
메스암페타민: 불법마약류 vs 코막힘 해소제
메스암페타민(methamphetamine)의 S-형은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의 재흡수를 억제하고 분비를 촉진하는 작용이 강력하여 ADHD와 같은 중추신경계 질환에 매우 효과적이며, R-형 보다 중추 효과가 4~10배 더 강력하지만, 이러한 중추신경게 자극 효과가 오용되거나 남용되어 흥분제, 각성제와 같은 불법마약류로 사용될 소지가 커 많은 국가에서 매우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다. 반면에 중추 효과가 훨씬 미미하고 주로 말초에서 작용하는 R-형은 일부 감기약 등에 코막힘을 해결하는 (nasal decongestant) 성분으로 합법적으로 팔렸지만 S-형이 가진 좋지 못한 이미지로 인한 것인지 R-형 또한 비충혈 완화제 작용을 하는 다른 성분들로 대체되어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두 거울쌍이 매우 다른 생리학적 특성을 보이는 예이다.
에탐부톨, 나프록센
두개의 키랄 중심이 있는 에탐부톨(ethambutol)의 (S, S)-형은 박테리아의 세포벽 합성을 억제하는 강력한 폐결핵치료제로 사용되는 데 반해, (R, R)-형은 시신경 병증을 유발하여 색맹 또는 영구적인 시력 소실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에는 라세미혼합물로 제조되었으나 현재 약품 정보를 찾아보면 IUPAC 이름이 ‘(2S,2'S)-2,2'-(ethane-1,2-diyldiimino)dibutan-1-ol’로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단독형 이성질체로 제조되는 것으로 유추된다. [1] 나프록센(naproxen)의 S-형은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제로 류마티스 관절염, 통풍등을 치료하지만 그 디스토머인 R-형은 생리활성이 거의 없기는 하나 간손상과 같은 잠재적 독성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단독 S-형만으로 제조되어 사용된다고 한다. [2]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키랄 약물들로 두 이성질체 간 약리학적 차이가 주위를 기울여야 할 만큼 크지 않아 보통 라세미체형을 갖는 약물들도 있다. 두 형태를 분리하여 특정 이성질체만으로 만들어서 확보할 수 있는 안정성과 이에 투입될 높은 비용간의 비교를 통해 제조 형태를 결정하였을 것이다.
항응고제 와파린(Warfarin)
쿠마린(Coumadin)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키랄 약물인 와파린은 비활성상태의 비타민K를 활성상태로 다시 환원되지 못하게 억제하고 차단함으로써 비타민K에 의존하는 응고 인자들의 활성을 억제하고 감소시켜 응고과정이 느려지고 항응고 효과가 생기도록 만들어 혈전 생성을 예방하는 약물이다. 그래서 비타민 K 길항제(antagonist)라고도 불린다. 실험결과 S-형 와파린이 R-형 와파린보다 3-5배 정도 더 강력하고 체내에서 대사도 더 빠르게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기는 하나, 큰 차이가 없어 보통 라세미체로 제조되어 왔다. [3]
이부프로펜
다양한 제품명으로 팔리고 있는 대표적 진통, 해열, 항염증제인 이부프로펜(Ibuprofen, C13H18O2)도 라세미혼합물로 사용된다. S-형은 활성형이고 R-형은 비활성형인데, R-형은 체내에서 S-형으로 전환된다. 실제로 효과를 나타내는 S-형 이성질체만 따로 분리하여 만든 덱시부프로펜 (Dexibuprofen)은 이부프로펜보다 효능이 더 강하고 위염 소화불량과 같은 부작용이 적다고 알려져 있다. 덱시부프로펜은 키랄스위치의 한 예이다.
키랄 역전(Chiral Inversion)
키랄 약물들에서 나타날 수 있는 특징 중 하나가 키랄 역전이 있다. 글 첫머리에 탈리도마이드의 비극을 설명하면서 어차피 두 이성질체를 따로 분리하여 투약하여도 체내에서 상호변환된다는 것을 언급했었다. 생체내 서로 상대방 이성질체로의 상호 전환(bioinversion) 또는 키랄 역전이란, 한 이성질체가 생체 내에서 효소적, 화학적 대사를 통해 다른 이성질체로 변환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키랄 역전을 보이는 다른 대표적인 예는 항염증제, 진통제, 해열제로 사용되는 프로펜(propene) 계열 약물들이다. 이들은 구조적으로 2-아릴프로피온산(2-arylpropionic acid) 유도체로 구성되어 있는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제 계열로서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부프로펜, 나프록센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대부분 S-형이 약리효과를 보이며 R-형들은 약리 활성이 거의 없거나 신장이나 간에서 효소들에 의해 S-형 이성질체로 전환될 수 있다. 이러한 역전에는 효소들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대사적 키랄 역전이라고도 부른다. 만일 우리 몸에 상처가 나게 되면, 인체는 이에 대응하기 즉각적인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그중 하나가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s)과 같은 염증 매개 물질을 분비하여 발열, 통증을 유발하여 빠른 회복을 꾀하는데, 진통제는 프로스타글란딘이 합성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거나 억제하여 염증을 완화하고 해열과 진통 효과를 보게 되는 기전이다.
이부프로펜의 경우, 실험실에서 S-형이 R-형보다 프로스타글란딘 억제효과가 무려 160배나 뛰어남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S-형 만을 투여했을 때 더 단시간에 더 강한 진통효과를 보였으며 부작용도 감소한 것으로 증명되었고, 물론 개별 환자의 대사능력에 따라 조금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체내에서 R-형이 S-형으로 최고 70%까지 전환될 수 있다고 한다. [4] 현재 라세미형태의 이부프로펜과 단일 S-형만으로 제조된 Dexibuprofen이 모두 시판되어 판매되고 있다. 키랄 연구에서 꽤 이름난 학자들도 강연에서 “not a big deal”이라고 하면서 두 이성질체를 구별해야 할 특별한 필요성이 없다는 듯이 말하기도 하던데, 비용상의 문제만 아니라면, 단일 이성질체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 단연 더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키랄 역전과 관련하여 가장 의미 있는 사례는 탈리도마이드 일 것이다. 앞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탈리도마이드의 두 이성질체는 체내에서 매우 다른 작용을 하게 되며, 설령 이를 염두에 두고 단일 이성질체 약품으로 제조한다 할지라도 체내에서 서로 상호변환되기 때문에 기형유발의 위험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어 안전성을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약품 제조 시 이러한 약리학적 특성을 매우 철저하게 평가하고 분석하여야만 한다.
키랄 스위치(Chiral Switch)
치료의 효율과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라세미 혼합물 형태로 판매되던 약물에서 더 효과적이고 부작용이 적은 활성형 이성질체만 따로 분리하여 이후 별도의 새로운 약물로 개발하는 것을 키랄 스위칭(chiral switching)이라고 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약물을 키랄 스위치(chiral switch)라고 한다. 위산 분비 억제제인 오메프라졸(Omeprazole)은 R-형과 S-형이 1:1 비율로 존재하는 라세미 혼합물이다. 이 중 S-형이 위산 분비 억제 효과가 훨씬 더 강력하기 때문에 S-형만 단독으로 이용하여 만든 약물이 에스오메프라졸(Esomeprazole)이다. 오메프라졸이 개개인의 대사 능력이 다르며 대사 효소(CYP2C19) 변이에 따라 약물효과가 달라질 변수가 더 큰 반면, 에스오메프라졸은 흡수율이 더 균일하고 대사과정에서 변이가 적어 생체 이용률이 훨씬 더 높고, 위산 분비 억제가 비교적 더 강력하고 오래 유지된다. 하지만 에스오메프라졸은 키랄 스위칭을 거치면서 제조 비용이 높아지기 때문에, 약물대사 변이가 높거나 위산 분비 억제가 매우 필요한 중증 환자가 아니라면 환자의 경제 상태를 고려하여 라세미체형인 오메프라졸을 처방하기도 한다고 한다.
약의 효능을 높이고 부작용을 낮추려는 의학적 의도와 별도로, 키랄 스위치는 하나의 전략적 마케팅 관행으로도 알려져 있다. 제약회사가 판매하던 기존 라세미 혼합물 형태의 약물에 대한 특허가 만료되면 제네릭 약물이 되어 다른 제약 회사들도 같은 약물을 제조 판매할 것이고, 특허 보유자로서의 독점이 제거되고 경쟁은 증가하여 가격이 하락할 것이므로 결국 수익이 대폭 감소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소위 대박을 친 약물의 경우 관련된 특허를 최대한 더 연장시키기 위해 즉, 흔히 말하는 '에버그리닝 전략(evergreening strategy)'의 하나로 기존 라세미 혼합형에서 효과가 큰 이성질체만 따로 분리하여 단독형으로 제품((enantiopure drug)을 제조한다. 부모 약물에서 분리되어 나온 단일 이성질체 약물에 대해 별도의 신규 특허를 신청하게 되면 새로운 시장도 창출할 수 있으며 신규특허로 수년간의 특허 독점과 데이터 독점권과 같은 혜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어 제약회사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훌륭한 마케팅 전략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라세미혼합형과 단일 이성질체 약물 간의 약효 차이가 매우 뚜렷할 경우가 아니라면 가격 차이로 인하여 외면받기 쉬운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다루겠지만 최근에는 약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단일 이성질체 제품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키랄 스위치 전략에는 변화가 온 것 같다. 이는 이어지는 키랄 약물 추세에 대한 글에서 다시 언급한다.
약물 재사용(repurposing)/약물 재배치(repositioning)
탈리도마이드는 약물 재포지셔닝에서 또다시 등장한다.(-.-) 앞서 우리는 탈리도마이드의 S-형이 태아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영양분을 전달해 줄 혈관이 생성되는 것을 막아 기형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일으킨 것을 살펴보았었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탈리도마이드는 효과적인 항암치료제로 다시 항암 치료분야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양이 성장하려면 혈관을 생성해야 하는데 탈리도마이드가 이를 억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탈리도마이드의 종양 혈관 성장 억제(anti-angiogenesis) 효과는 특히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multiple myeloma)과 같은 암치료에 유용한 약물로 재조명되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탈리도마이드는 사이토카인 인터루킨-2(IL-2)의 생성증가로 T세포 생성을 촉진하고, TNF-α(종양괴사인자)를 억제하며, 자연살해세포(NK cell)를 자극하는 등 염증을 줄이고 면역 체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5], 자가면역질환이나 염증성 질환의 치료에도 유효할 수 있다고 한다. 악명 높은 탈리도마이드의 변신이다. 탈리도마이드 자체가 독이고 해로운 것이 아니라, 어떤 도구로 누구의손에 쥐어지는가가 관건이었으며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위험이 될 수 있고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키랄약물의 여러 특성과 약품화 과정에서 이성질체들을 어떻게 이용하는 가를 전반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 키랄약물과 관련된 최근 동향과 방향성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 자료]
[1] https://www.ebi.ac.uk/chebi/searchId.do?chebiId=4877
[2] Naproxen-induced liver injury
https://pubmed.ncbi.nlm.nih.gov/21947732/
[3] Enantiomers of warfarin and vitamin K1 metabolism.
https://doi.org/10.1111/j.1365-2125.1986.tb02966.x
[4] Metabolic chiral inversion of 2-arylpropionic acid derivatives (profens)
https://journals.viamedica.pl/medical_research_journal/article/download/MRJ.2017.0001/41638
[5] How Thalidomide Works Against Cancer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4084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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