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성 오비탈 이론(Hybrid Orbital Theory)
궤도(orbit)와 궤도(orbital)?
궤도(orbit)란 말은 태양 주변을 일정하고 차분하게 돌고 있는 태양계를 떠올리게 한다. 한 때 전자들도 원자핵 주변을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돌고 있을 것으로 가정하였지만 이후 전자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전자가 가진 특이한 이중적 성격으로 전자를 일반적인 궤도라는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음이 밝혀졌다. 양자 역학의 발전과 함께 전자의 위치는 다만 전자가 있을 것으로 추축 되는 확률이 90% 이상인 공간을 함수로 계산하여 좌표에 나타내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이것이 오비탈(orbital)의 개념이다. 존재할 확률이 높은 분포를 오비탈로 표현하고 그 구름 같은 공간 어디엔가 전자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표준적인 전자 배치만으로는 전자들이 다른 원자들과 실제로 결합을 형성할 때 전자들의 위치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제시되었고, 그것이 혼성오비탈 이론(Hybrid Orbital Theory)이다. 혼성 궤도라고 번역하면 위에서 언급한 의미의 궤도(orbit)와 혼선을 빚을 수 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오비탈이라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나는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원자의 전자껍질과 전자 배치
원자들 내부에서 전자들이 어떻게 배치되는가를 예전글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주 빠르게 기억을 상기시켜 보자면, 중앙에 원자핵이 위치하고, 특정한 에너지 레벨(준위)에 따라 K, L, M 등의 껍질이 구성되어 원자핵 주변을 감싸고 있으며, 다시 이들 개별 껍질은 그 하위에 s, p, d, f 등의 부껍질들로 구성된다. 이 부껍질을 오비탈(orbital)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자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률분포도로 계산하여 이를 3차원 공간좌표에 3D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껍질 내 첫 번째 오비탈인 s 오비탈은 확률이 구(sphere) 모양으로 존재하고, 다음 p 오비탈은 3개의 축(x, y, z)에 덤벨모양으로 그려진다. 덤벨모양의 세 방향의 축 안에서 전자가 발견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전자는 각 오비탈에 최대 2개씩 위치할 수 있고, 이 둘은 같은 오비탈 내에서 업스핀과 다운스핀으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위치하며, 모든 껍질들은 순서대로 s오비탈을 채운 뒤, 다음 p 오비탈을 채워 간다. 이와 더불어, 최외각껍질의 전자 수가 8개일 때 그 원자는 가장 안정적이라는 옥텟규칙도 살펴보았었다. 최외각의 전자가 8개보다 많거나 부족한 원자들끼리 서로 협력하여 전자를 주고받거나, 함께 서로 내어주고 8개를 만들기 위해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원자 내 전자구성에 대하여 아주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이전 글을 참조할 수 있다.
** 오비탈에 대한 이전글.
[Fabulous 기초과학/화학의 기초] - 1. 원자: 기본부터 시작하자.
[Fabulous 기초과학/화학의 기초] - 2. 원자: 주기율표의 주기(전자껍질과 s,p,d,f 오비탈)
[Fabulous 기초과학/화학의 기초] - 3. 원자: 주기율표의 족과 3대 화학결합(이온, 공유, 금속결합)
최외각 전자를 8개로 채우기 위한 옥텟 규칙에 근거한 전자들의 결합이론에는 한계가 있다. 탄소의 원자가 전자배열(valence electron configuration)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탄소의 원자번호는 6이고, K 껍질의 1s오비탈에 2개, L껍질의 2s 오비탈에 2개, p 오비탈 중 px에 1개, py에 1개, 총 6개의 전자를 갖는다. 이 배열은 바닥상태(ground state)로 안정적인 상태에 있는 탄소를 설명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나, 유기화합물 형성에서 가장 필수 적이고 가장 공통적으로 참여하는 탄소가 다른 원자와의 다양한 결합을 설명할 경우에는 한계가 생긴다. 탄소는 다른 원자와 결합하는 팔(?)이 4개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자 배치라면 탄소는 2개의 결합에만 참여할 수 있다. 짝을 이루지 않은 전자(unpaired electrons)가 2개면 2개의 공유결합 밖에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한계를 극복할 창의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혼성화 이론의 등장이다.
화학에서 혼성화(hybridization)란 두개 이상의 표준 원자 오비탈을 마구(?) 혼합하여 전혀 다른 유형의 오비탈을 새로이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가 하나만 채워져 있든 2개의 전자가 모두 채워져 있는 오비탈이든 서로 에너지 레벨이 거의 동일한 경우 모두 혼성화에 참여할 수 있다. 혼성화가 이루어지면 그 결과로 다른 에너지 레벨과 모양을 갖는 오비탈들이 탄생한다. 혼성화는 원자 간에 이루어지는 결합의 종류, 결합의 강도 등을 비롯하여, 분자의 모양을 예측해 보는 분자 기하학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된다. 혼성화 오비탈은 혼합되는 오비탈의 종류, 혼합되는 오비탈의 개수 등에 따라 sp3, sp2, sp, sp3d, sp3d2, sp3d3 등으로 구분된다. sp3d2, sp3d3의 경우 d 오비탈까지 참여한다.
왜 혼성화를?
오비탈이 원자내에서 전자가 어디에 존재할 것인지를 파동함수를 근간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혼성화된 오비탈 역시 전자를 발견할 가장 높은 확률을 가진 공간적 분포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혼성화 오비탈에 있어서 그 초점은 다른 원자와 결합을 이루기 위해 전자가 과연 어떻게 배치되는가에 맞춰진다. 혼성화를 통해 전자의 밀도를 특정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줌으로써, 다른 원자와 더 강하고 안정적으로 결합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표준 오비탈인 s 오비탈의 경우 그 오비탈 내의 전자 분포가 구(sphere) 형으로 표현되며 그 구 안의 공간에서 특정한 방향 없이 모든 방향으로 균등하게 전자 밀도가 분포하는 반면, 혼성화된 오비탈은 방향성을 가지며 집중되기 때문에 오비탈끼리 겹쳐 결합을 이룰 때 훨씬 효과적이다. 또한 혼성화는 전자들 간의 반발력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결합 각도를 갖도록 최적의 기하학적인 형태를 갖게 만든다. 혼성화를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했다면, 이러한 장점들이 그 대답에 포함될 것이다. 전자 밀도를 집중시켜 오비탈끼리의 겹침을 극대화 및 최적화하여 강하고 안정적인 결합을 할 수 있는 구조를 생성하기 위함이다. 도움이 안 된다면 굳이 원래의 오비탈들이 마구 뭉쳐 번거롭게 혼성화를 하려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혼성화의 목적은 결합을 최적화하고, 분자의 안정성과 구조적 특징을 향상하는 데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참고로, 동일한 원자내에서 일어나는 오비탈들의 혼합이 혼성화라면, 두 원자가 결합하여 하나의 분자를 이루었을 때, 그 분자 전체에 걸쳐 전자가 어느 오비탈에 분포하는 지를 확률적으로 계산하여 보여주는 이론이 분자 오비탈(Molecular Orbital: MO) 이론이다. 두 원자가 결합할 때 전자 밀도의 재분배가 일어난 다는 점은 혼성 오비탈이론과 왠지 닮지 않았나 싶다.
혼성화의 유형 결정
혼성화는 결합(bonding)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다양한 원소들과 결합하여 유기 화합물을 이루는 대표적인 원소인 탄소를 중심으로 혼성화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탄소의 가장 일반적인 세 가지 혼성화 형태인 sp, sp2, sp3 혼성화 유형을 자세히 탐구해보자.
생명 활동의 기반인 유기화합물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탄소는 수소와 결합하여 탄화수소(hydrocarbon) 화합물을 형성하거나, 산소, 질소, 황, 할로겐(F, Cl, Br, I) 등의 원자와 결합하여 탄소화합물을 형성한다. 우리 인체는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등의 탄소 화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명 유지를 위한 에너지원이 되는 포도당 역시 탄소 화합물이고, 우리 주변의 석탄, 석유 등의 화석연료, 플라스틱, 섬유, 약품, 의약계 등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만물들이 탄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탄소가 이렇게 광범위하게 활약할 수 있는 비결 중 하나가 혼성화라고 할 수 있다. 탄소의 다양한 결합 방식과 구조적 다양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핵심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다.
탄소의 혼성화
탄소의 바닥 상태 전자 배치는 1s2, 2s2,sp2이다. 첫 번째 전자껍질(K껍질) 안 1s 오비탈은 안정적 상태로 결합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최외각 껍질이 되는 두 번째 껍질(L 껍질)의 2s2, 2p2 만이 관련된다. 2개의 p 오비탈에 전자가 하나씩(짝을 이루지 않고) 들어있고, 하나의 p 오비탈은 비어있는 상태이다. s와 p 오비탈은 에너지레벨이 다르다는 점과 짝을 이루지 않은 전자 오비탈이 2개로 결합에 참여할 수 있는 오비탈이 2개라는 점을 기억하자. 혼성화는 다른 원자와 결합을 이루려는 시점에서 일어난다. 탄소는 여러 형태의 혼성화를 이룰 수 있는데 이중 어떤 형태의 혼성화를 이룰 것 인가는 결합을 이루고자 하는 파트너 원자의 개수와 결합의 형태(단일 결합, 이중결합, 삼중결합)에 의해 결정된다. 즉, 탄소가 4개의 원자와 단일 결합을 형성하려면 4개의 동일한 혼성 오비탈(sp³)이 필요하고, 3개의 원자와 결합하면서 이중 결합을 형성할 때는 3개의 혼성 오비탈(sp²)이 필요하다. 그리고 탄소가 2개의 원자와 결합하면서 삼중 결합을 형성할 때는 2개의 혼성 오비탈(sp)이 필요하다. 결합의 요구조건에 따라 맞춤형으로 스스로의 오비탈을 변형시킬 수 있는 탄소의 창의력과 융통성이 참으로 놀랍다.
탄소의 혼성화 과정
오비탈 간의 에너지 차이와 결합을 수행할 오비탈 부족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것이 혼성화이다. 먼저 에너지 레벨을 동등하게 만들기 위하여 2s 오비탈의 전자 하나를 비어있는 2p 오비탈로 이동(승격)시킨다. 다른 오비탈이라도 에너지 레벨이 같아야 혼성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승격되면서 이들의 에너지레벨은 동등해지며 그 에너지는 기존 2s와 2p 오비탈의 에너지 수준의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sp, sp2, sp3 유형 모두에게 동일하게 일어난다. 이제 혼성화를 할 준비가 되었다.
이렇게 2s 오비탈과 2p 오비탈의 에너지 레벨이 모두 동일해진 흥분 상태(excited state)로 바뀐 후, 탄소는 상황에 따라 여러 유형의 혼성화를 시작한다. 탄소의 가장 대표적인 3가지 혼성화 유형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sp3 혼성화
결합할 대상인 원자가 몇 개인지에 따라 혼성화의 종류가 달라진다. 가장 일반적이고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은 sp3 혼성화로서 단일 결합만을 이룬다. s 오비탈과 p 오비탈이 혼합되는 비율은 혼성화 유형별로 다른데, sp3 혼성화의 경우 s 오비탈이 25%, p 오비탈이 75% 로 혼합에 기여한다. 이는 모두 혼합된 후 동일한 4개의 오비탈을 생성하는 아주 심플한 유형이다. 새롭게 생성된 이들 4개의 오비탈들은 주변의 4개의 원자들과 4개의 시그마 결합(σ bond)을 형성한다. 모두 단일 결합만을 이룬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며 꼭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단일(시그마) 결합을 이룬 원자들은 자유로운 회전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3차원적으로 배치만 다른 수많은 입체 이성질체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체 이성질체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기로 한다.
sp2 혼성화
다음은, 동일한 에너지를 갖게된 4개의 오비탈 중 3개를 혼합하여 새로운 균등 오비탈을 만드는 경우이다. 혼합 시 비율을 보자면, 대략 s 오비탈이 33%, p 오비탈이 67% 정도로 기여하게 된다. 이때 하나의 p 오비탈은 혼성화에 참여하지 않고 남는다. 이 p 오비탈은 전자를 하나 갖고 있는 짝지어 지지 않은 오비탈 상태이다. 이 p 오비탈이 이후 다른 원자와 결합을 형성할 때, 다른 원자의 p 오비탈과 평행으로 겹치면서 파이 결합(π bond)을 형성하게 된다.
sp 혼성화
끝으로, 4개의 오비탈 중 2개의 오비탈만을 혼합하여 2개의 새로운 혼성오비탈을 생성한다. s 오비탈이 50%, p 오비탈이 50%로 혼합된다. 나머지 두 개의 p 오비탈은 각 하나씩의 전자를 품은 상태로 남아 혼성화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 들 p 오비탈들은 이후 다른 원자와 결합 시 2개의 파이 결합(π bond)을 형성한다.
다음글에서 혼성화된 탄소가 어떻게 시그마 결합과 파이결합을 형성하는지, 시그마 결합과 파이 결합이 단일 결합과 이중 또는 삼중결합과 어떤 관계인지 등을 자세히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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